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리 앙투아네트 (문단 편집) === 정치적 측면 === 일단 마리 앙투아네트의 정치성을 논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사실로, 그녀가 오스트리아 황족 출신이라는 것을 들 수 있다. 비록 프랑스의 왕비이긴 하지만 마리 앙투아네트가 가진 [[합스부르크 가문]]의 피는 언제까지고 그녀의 주위를 맴돌았고, 그 특수한 배경을 제외하고는 그녀를 이해할 수 없다.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령 오스트리아 대공국이 있는 [[신성 로마 제국]]은 [[30년 전쟁]]으로 황제가 북독일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면서 그 자리를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프로이센 왕국]]이 대체해 강국으로 부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합스부르크 제국|오스트리아]]와 [[프랑스 왕국|프랑스]]는 이를 견제할 필요를 느꼈고, 그 동맹의 증표로 맺어진 것이 1770년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딸인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15세]]의 손자인 루이 오귀스트([[루이 16세]])의 혼인이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오스트리아-프랑스의 우호관계를 상징하는 마스코트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형제 자매들은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에 의해 대부분이 [[부르봉 왕조|부르봉 가문]]과 [[정략결혼]]했다. 그러나 형제 자매들의 결혼 대상은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반도]]의 [[파르마 공국]], [[나폴리 왕국|나폴리]]-[[시칠리아 왕국]] 등 부르봉 방계이고 부르봉 가문의 본국인 [[프랑스 왕국]]으로 시집(장가)간 건 마리 앙투아네트가 유일했다. 게다가 루이 오귀스트([[루이 16세]])는 프랑스의 왕위 계승자였으니, 가히 마스코트라 할 만하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사이의 관계는 그리 좋지 않았다. [[동맹의 역전|새롭게 나타난 공동의 적을 맞아 손잡긴 했으나]] [[막시밀리안 1세(신성 로마 제국)|막시밀리안 1세]]와 [[루이 11세]]부터 수 백년 동안 계속되어 온 갈등의 골은 그 정도로 메워질 깊이가 아니었다. 때문에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국민들의 여론은 그다지 우호적이지 못했다. 이 여론은 결혼 초에 후사를 보지 못하고 [[루이 16세]]와의 관계가 소원하다는 소문이 나돌며 그대로 굳어졌고, 그 후의 마리는 악의적 루머의 희생양이 되게 된다. 결국 평생 "오스트리아 스파이"나 "오스트리아년"[* L'Autrichienne(로트리시엔)이라는 멸칭으로 불렸는데, 사실 이 단어 자체는 그냥 평범하게 '오스트리아 여자'라는 뜻이다. 하지만 'chienne'이란 단어가 '개(여성형)' 뜻이어서 사람들이 그 부분을 강조해 부르곤 했다고. 대충 '오스트리아 개년' 정도의 뉘앙스가 된다.]이라는 빈정거림을 들었고, "루이 16세를 조종하여 프랑스보다는 친정 오스트리아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게 하고 있다"는 [[음모론]]까지 돌았다. 그러나 이는 반대에 가까웠는데, 마리 앙투아네트는 계속해서 프랑스 정치에 개입하려고 했던 큰오빠 요제프 2세의 요구를 거절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모친인 [[마리아 테레지아]]는 남편 [[프란츠 1세]]가 황제라곤 하나 사실상 [[데릴사위]]이자 [[허수아비]]인 바지사장이고, 앙투아네트의 [[마리아 아말리아|언]][[마리아 카롤리나|니]]들도 하나같이 남편과 권력을 둘 다 손에 잡고 휘둘렀다. 그러나 정작 프랑스에서 남편을 잡고 휘두른다는 이미지였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집안에서 거의 유일하게도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친정어머니의 가르침을 실제로 따르는 편이었다. 혁명 전의 치세에서 [[루이 16세]]는 아내의 정치 개입을 철저히 막았고, 마리 앙투아네트 또한 정치에 무관심했다. 애초에 당대 [[왕비]]들은 정치 참여가 거의 불가능하긴 했지만, [[마리아 테레지아|어머니]]나 [[마리아 아말리아|언]][[마리아 카롤리나|니]]들이 하나같이 예외 사례들이었기 때문에 마리 앙투아네트가 유별나게 보이긴 한다. 하지만 1789년 7월, 혁명이 발발하고 루이가 권력을 잃으면서 아내에게 의지하기 시작하자, 점차 정계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짧은 기간이었기 때문에 평가를 내리기에 곤란한 감도 없지 않으나 최소한 왕당파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것은 확실하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영웅적이라기보단 다른 사람들과 비슷한 평범한 인물이었지만, 당시 왕당파들에겐 거의 [[성녀]]와도 같은 완전무결한 여성으로 여겨졌다. 왕당파였던 [[오노레 가브리엘 리케|미라보 백작]]과 손을 잡고 신권과의 타협을 모색했으며 친정인 오스트리아와 연계해 군사행동을 유발함으로써 은근히 혁명 정부에 압력을 넣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민간에서 왕실의 이미지를 우호적으로 만들고자 비싸져서 못먹게 된 [[밀가루]][[빵]] 대신 값싼 [[감자]]빵을 먹을 수 있도록 제빵학교를 열어 지원하고, 자식들에게 빈민가를 보여주거나 빈민들을 구휼하는 일을 가르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자선사업을 벌였다. 후기의 마리 앙투아네트가 유행시킨 슈미즈 아 라 렌도 전성기 때의 마리 앙투아네트의 드레스와 비교하면 많이 단순해졌는데 이는 사치로 인한 비판을 덜고자 한 조치로 보인다. 20세기의 소설가인 [[슈테판 츠바이크]]는 "혁명 전에 순수했던 이미지가 혁명을 겪고서 강건해졌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루이 16세]]는 신체적·정신적 한계가 뚜렷한 바, 차라리 그녀가 '''혁명 전에 이렇게 성장했다면''' 더 나았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하지만 강력한 카리스마로 사람들을 규합하고 과감성과 엄정함으로 나라를 개혁시킨 어머니, 언니들과 비교하면 이러한 선행은 도움이 될지언정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평범한 황녀이자 왕비로 성장한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있어 어머니, 언니들이 특수한 거고 이 정도가 발상의 한계인 것은 어쩔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허나 [[루이 16세]]가 왕가의 입지를 크게 악화시키는 일을 저지르는데, 일명 [[바렌 사건]]이라고 한다. 1791년 6월 당시 국왕 일가는 [[파리(프랑스)|파리]]에 거의 억류되다시피 한 상태였는데, 혁명파와의 의견차를 좁히는데 실패하고 유일한 협력자라고도 할 수 있는 미라보마저 사망하면서 정치적으로 위기에 빠지게 된다. 거기에 루이 16세의 동생인 [[샤를 10세|아르투아 백작]]이 장인 사르데냐 국왕을 등에 업고 군대를 동원하려 했고, 루이 16세의 숙모 2명이 프랑스 밖으로 탈출했기 때문에, 왕실에 대한 국민의 분노가 격앙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루이 16세]]가 중병을 앓아 사경을 헤매게 되자, 국민의회는 섭정으로 루이 16세의 가장 큰 경쟁자이며 동생인 [[루이 18세|프로방스 백작]]을 선출했다. 그러자 왕태자 [[루이 17세|루이 샤를]]의 왕위 계승마저 불가능해질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더구나 [[미사]]에 참례하러 떠나는 왕의 마차를 성난 군중들이 둘러싸는 사태가 발생했고, 국왕 호위대조차 혁명 세력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물론, 국왕 부부가 영웅적인 용기를 지녔다면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지도 몰랐으나, 그들은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결국 국왕 일가는 [[파리(프랑스)|파리]]를 탈출하여 국경으로 향했으나 신속하게 이동하지 못한 탓에, '바렌'이라는 마을에서 붙잡혀 파리로 압송되었다. 최종 목적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국민들에게는 오스트리아 영내로 들어가거나 국경지역에서 오스트리아군과 조우할 계획으로 여겨졌다.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앙투아네트의 오빠인 [[레오폴트 2세]]는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으나 [[제네바]]를 탐내는[* 제네바는 [[사보이아 백국]] 시절 [[사보이아 가문]]의 영토였기 때문에 사보이아 가문은 [[카를로 에마누엘레 1세]]가 제네바에서 대판 깨진 이후에도 대대로 이곳을 노렸다.] [[사르데냐 왕국]] 국왕 [[비토리오 아메데오 3세]]의 지지를 얻으라든가, [[스페인]]에게 [[나바라]] 지방의 이권을 양보하고 지원을 받으라든가 등, 편지를 통해 마리에게 조언을 해주긴 했지만 막상 자기 자신은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 정확히 마리 앙투아네트는 [[알자스]]를 통해 [[스위스]]로 들어가, 왕실에 우호적인[* 마리 앙투아네트는 결혼 전 [[로렌 공국]]의 공작이었던 [[프란츠 1세]]의 딸이기도 했다.] [[로렌]] 지방의 지지를 얻으려 했다. 당시의 프랑스 국민들은 엄청난 패닉에 빠졌다. 왕이 자신들을 버렸다는 것만으로도 충격적인 일에다 [[루이 16세]]가 오스트리아에서 군대를 불러들일 경우, 그들의 총구가 어디로 향할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미라보의 사망 이전까지 급진파는 소수에 불과했고 다수의 중도파를 왕당파가 포섭해 나가는 형국이었으나, 미라보 사후 세를 불려나가던 자코뱅 당이 이 사건을 통해 본격적으로 득세하게 되었다. 왕가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그야말로 땅에 떨어져 결국 [[루이 16세]]의 몰락의 단초가 되었고, 왕 본인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또한 이 사건이 왕비 주도로 이루어졌다는 소문이 돌면서, 마리 앙투아네트의 입지도 크게 악화되었다. 안 그래도 그녀는 프랑스의 원수인 오스트리아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온 국민의 반감을 사고 있었는데, 남편이 오스트리아로 도주하려고 하자 이것이 마리 앙투아네트의 주도로 알려진 것이다. 프랑스 국민들에게는 그녀에 대한 무비판적인 증오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루이 16세]]의 주도로 이루어진 일이지 마리 앙투아네트가 주도한 일이 아니며, 때문에 루이 16세가 반역죄로 처형된 반면 왕비는 무죄판결을 받았긴 했다.] 그녀는 1793년 1월 혁명파에 의해 남편이 죽고 나서 유폐되어 있다가, 재판을 받고 10월에 반역, 국고낭비, 국가에 대한 음모죄로 [[단두대]]에 올라 처형되었다. 집행자는 [[18세기]]의 유명한 [[망나니]]인 [[샤를 앙리 상송|샤를앙리 상송]]으로, 젊은 시절 [[뒤바리 부인|바리 백작부인]]과 만난 적도 있으나 나중에 그녀를 처형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